5.15.2011

집시의 칼_시드니셀던

짙은 안개가 밤을 재촉하고 있었다. 빅벤이  자정을 알린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안개는
템즈 강에서 계속해서 기다란 띠를 이루며  꾸역꾸역 트라팔가 광장 쪽으로 밀려들고  있었
다. 희끄무레한 안개로 뒤덮여 있는  넬슨 기념비가 마치 수의를 뒤집어쓰고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시체처럼 보인다.
  사라는 아까부터 차링크로스 역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보도 위를 걸어가고
있는 그 걸음걸이에서 뚜렷한 목적이 없이 배회하는 자의  심정이 엿보인다. 그녀의 걸음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등뒤에서는 차링크로스 역의 둥근 시계가 안개에 가려진채 어슴푸레한 불빛을  발
하고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녀는 마침내 희미한 불빛이 비치
는 가로등에 등을 기대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모조가죽 핸드백을 열고 담배를 꺼내 입
에 물었다.
  라이터 불빛에 잠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그다지 젊지 않았다. 마흔 살 정도 되었을까? 감
정 없는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불룩한 젖가슴에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스커
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거리의 여자다웠다.
  요즘 매춘부들은 다들 고급 패션모델처럼 차리고 다닌다. 대부분  아직 20대인 사라의 동
료들은 절대 그런 모습으로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 고급스런 옷을 입고 나른한 걸음으로 거
리를 거닐면서 살며시 미소를 던질 뿐, 절대로 손님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그 옆을 스
치며, 자극적인 향수 냄새를 풍길 뿐이다. 그것만으로 남자가 자기를 따라올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그렇게 접근해 온 남자의 팔짱을 가볍게 끼고 사라지면 그뿐이다.
  그러나 사라는 그렇지 않다. 마치  자신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추파를 던지는
것이,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짐승 같다.
  나이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날이 그녀가 이 사냥터에서 전리품을 가져갈 확률은 희박해지고, 손님들은 그녀의 얼굴
을 확인하곤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선다. 어디 그뿐인가.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욕설을
던지고 가버리는 녀석들도 있으니. 이래저래 사라는 마음이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약중독자인 그녀는, 단 하루도 마약 주사를 맞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다. 먹
고 살기 위해 육체를 움직이려면, 마약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저녁부터 거리를 거닐어야 하는데, 재수없는  날은 50파운드짜리 숏타임 상대
하나도 건질 수가 없다. 물론, 특별히  운수가 좋은 날이라면 200파운드짜리 올나잇  손님이
걸려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공짜는 없어. 돈을 가져와! 무엇들 해서든."
  사라의 악랄한 기둥서방, 듀크는 며칠째 그녀에게 약을 주지 않고 있다. 약만 있다면... 사
라의 입술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파리하게 변해갔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음주와 마약... 그
날도 사라는 싸구려 셋방에서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뜬 뒤, 감자칩 한 봉지와 진한 커피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운 다음, 브래지어를 걸치고, 스웨터와 검은  가죽 스커트를 입고, 가죽 부
츠를 신고서, 얼굴엔 분을 바르고, 입술엔 빨간 루즈를 칠하고 거리에 나선 것이다.
  그녀는 가로등에 기대어, 또 한 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둠이 내린 런던 시내에는  오
렌지빛 가로등만이 졸음기 어린 눈처럼 아른아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라는 이 골목이 좋
았다. 이 거리는 20여 년 전, 그녀가 첫 손님을  낚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때 얼마를 받았더
라? 사라는 안개와 스모그와 니코틴이 범벅이 된 런던 공기를 들이마시며 잠깐 생각했다.
  '이 거리에 선 지도 벌써 20년째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자꾸만 기침이 났다. 이대로 자신의 어둑한 아파트로 돌아가  뜨
거운 오트밀이라도 한 접시 먹고 푹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침에 주인 여자가 와서 방세를 독촉했을 때, 짜증 섞인  눈길을
던지던 듀크의 무자비한 얼굴이 떠올랐다. 머뭇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듀크는 낡아서 반들반
들해진 가죽 스커트를 집어던지며 닦달했었다.
  "어서 나가서 당장 돈을 벌어와!"
  얼굴이 험악해진 그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더니, 거칠게 코르셋을
채웠다.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듀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렇게 해서 그녀는 이제는 너무 오래 입어서 반들반들 닳아버린, 그리고 나이에 턱없이 어울
리지도 않는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이 가로등 아래로 내몰린 것이다.
  그녀가 한 개비의 담배를 다 피워갈 무렵, 그녀 앞으로 두 명의 사내들이 지나갔다.  그녀
는 억지로 웃음띤 얼굴로 윙크를 하며 휴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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